정화.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함.
정화라, 말을 그렇게 들어도 정작 무엇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마법사들이라면 정화마법이 있지 않을까, 정령사들이라면 정령들에게 부탁해 일부분이라도 섬을 다시 보기좋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런 재능이 없는 저는 무엇을 해야 좋을까. 가지지 못한 것 부터 떠올리게 되는 것이 나쁜 버릇이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지 않아야지 라고 마음먹는다고 그것이 그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면 나쁜 습관이나 버릇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을테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몸쓰는 일 외에 더 있을까.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제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 이틀을 마음편히 쉬어서인지 복잡한 머릿속에 비하면 가뿐하기 그지없는 몸을 일으켰다. 하우스 밖으로 향하는 걸음걸이에 고민은 더 이상 섞여있지 않았다. 할 수 있는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하우스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어디든 걸음을 옮겨서, 그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게 더 생산적이리라 판단한 것일 뿐이었다.
척박한 땅이라는 말은 그른 말이 아니었던 것인지. 밖을 꽤나 한참 돌아다녔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라비틀어진 식물들의 흔적과 언젠가는 동물이었을 정체모를 백골들 뿐이었다. 잡초만 무성하고 도무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가 없다. 단장은 용케도 이런 곳에서 뱀을 찾아 잡아왔군,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이어가며 앞길을 막는 풀무더기들을 베어내었다. 나아가는 길마다 길을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 하고 한숨같은 탄식을 뱉어내곤 단도를 집어넣고 레이피어 다음으로 애용하는 사브르를 손에 쥐었다.
"베어내는건 힘이 많이 들어가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말이죠."
검 끝을 하늘위로 향하고 검을 든 손을 천천히 심장께로 당겼다. 쓸데없는 폼을 잡는다, 고 잔소리를 하던 스승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아 피식 웃었다. 그대로 검을 내질러 왼쪽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다시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휘둘러 제 길을 가로막은 잡초-를 비롯한 그와 비슷한 것들-을 깔끔히 베어내었다. 길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나아감을 막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베어서, 부숴서 없애버리면 그만이니까. 뿌리를 잃고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풀과 나무조각 같은 것들은 한켠으로 치워두었다.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게 두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일 테니까.
개운할 정도로 말끔해진 눈 앞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검을 정리해 넣고 만들어진 길로 나아가기로 했다. 조금 억지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정화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깨끗하게 만든건 사실이니까. 이건 정화라기보단 정리, 청소에 더 가까워보였지만 단어적인 의미를 비교하자면 그것또한 비슷한 것이니 이번만은 살짝 억지를 부리기로 하자.
*****
이상 마물 현상의 시초, 로 보인다고 하기에 섬은 생기가 없다 뿐이지 조용하고 한적해서 길을 만들고보니 거닐며 잡생각을 정리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최근엔 딱히 고민거리도 없고, 제 흥미를 돋구는 것도, 잡생각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긴 했지만. 무성한 것은 잡초뿐만이 아니었다. 나무나 꽃들을 비롯해서 그야말로 식물들의 낙원이었다. 그것이 인간인 제 눈으로 보이게 썩 아름답지 않다는 점은 조금 거슬리긴했지만. 이곳은 예전에 굉장히 아름다운 섬이어서 관광지이기도 했다고 했었지. 크게 자란 나무아래에 떨어진 이름 모를 열매를 주워들었다. 이 상황이 해결된다고 해서 이 섬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처럼 이 묘한 식물들이 살아가는 섬으로 두는 것도 괜찮지 않으려나. 마물들의 문제가 해결되면 지금은 포식자를 피해 숨죽이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동물들의 생태계도 커질 수 있겠지. 주워든 열매를 비교적 나무들이 적은곳에 파뭍었다. 무책임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원래대로 돌릴 수 없다면 유지보수라도 해주는게 인간된 도리 아니겠어요. 제 어깨를 으쓱이며 높게 솟은 나무위로 올라 두껍고, 튼튼한 가지에 걸터 앉았다.
제 머리위에 있던 해가 어느 덧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섬에 생겨난 이 기묘한 생태계를 좀 더 넓게 볼 수는 있었다. 휘유, 바람새는 듯한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기묘하고 이름모를 것들이 가득한 섬은 제 지식욕을 불태우기에 안성맞춤일 테니까. 역시 이 일에 자원하길 잘했다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런, 너무 늦기 전에 돌아가는게 좋겠죠."
서쪽 하늘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붉게 물들기세였다. 가볍게 나무에서 뛰어내리곤 탁탁 소리내어 손을 털었다. 정작 한 일이라곤 하우스 근처에 길을 만들고 열매를 심었을 뿐인가. 정화라는 단어와는 좀 거리가 있어보이긴 했지만 제가 만족했으니 되었다, 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은 이제 사람들의 관광지가 아니고 곧 마물들의 섬도 아니게 될테니까.
하우스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하우스를 나설 때의 발걸음보다 배는 더 가벼웠다. 캄캄해지기 전에 돌아가자.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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